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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삶, 드라마 <개과천선>이 던지는 질문

최고의 사회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으며 방송됐던 MBC 드라마 <개과천선>(2014.4.30~6.26 / 연출 박재범, 오현종 | 극본 최희라).

이 드라마는 거대 로펌(차영우펌)의 에이스 변호사인 김석주(김명민 분)가 우연한 사고로 기억을 잃은 뒤,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보며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내용을 다룬 휴먼 법정드라마인데요.

기억 상실을 자극적인 소재로 삼는 막장드라마와는 달리, 자기 삶의 성찰이라는 것으로 연결했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지요. 이 드라마는 기억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기억은 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요?

드라마 <개과천선>의 주인공 김석주(김명민) 변호사는 타고난 두뇌에 설득력 있는 말빨, 치밀한 성격을 지닌, 국내 최고 로펌(차영우 펌)의 자타공인 에이스 변호사입니다.

‘일제 강제 노역’ 피해자들의 민사 소송에서, 일본 기업의 편에서 변호를 펼쳐 일본 기업의 승리를 이끌어내고, 증인을 매수해 ‘재벌2세 성폭행 사건’에서 재벌2세의 무죄를 인정받게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소를 하며 거대 기업과 권력의 이익을 대변하지요.

그런 어느 날 그는 의문의 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게 됩니다. 법률적 지식은 그대로인데, 나머지 기억은 잃어버리는 ‘해리성 기억상실증’.

그런데 병원에서 깨어난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김석주(김명민)가 됩니다. 웃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말투도 부드럽게 변하지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던 냉정함은 사라지고, 병원에서 만난 어르신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어려운 점을 해결해주려 합니다.

스스로도 “생각은 안 나지만, 누군가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았겠지” 하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기대도 잠시… 병원을 나와 자신의 과거 삶과 대면하면 할수록 그는 당황하게 됩니다.

늘 강자의 편에 서서 약자들을 억울한 피해자로 만들어버린 삶.
늘 돈과 성공만을 바라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던 삶.
사랑조차도 정략적으로 선택했던 삶.
과거를 알아갈수록 자기가 왜 그랬는지 당혹스러워집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지요.

‘나는 대체 왜 그런 삶을 살았던 걸까?’

그리고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그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밝혀지지요. 바로 인권변호사이자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아버지하고의 기억.

석주(김명민)의 아버지 김신일(최일화 분)은 판사로 재직 중 독재정치 하에서 정권에 반하는 판결을 내려다 옷을 벗고, 인권변호사가 되어 약자들과 대의를 위해 살게 되지요.

그러다가 오랜 기간 수감 생활을 하게 되어 가족과 병든 아내의 곁을 지키지 못했고 그로 인해 아들 석주와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유일하게 남은 석주의 어린 시절 기억은 아버지가 잡혀가던 날의 슬프고 무섭고 외로웠던 순간, 그 아픈 기억들로 인해 반대급부로 점점 더 냉혹한 변호사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특히 지나칠 정도로 약자에 대한 동정이 없었던 그의 성격이 형성된 배경도 차영우(김상중 분)를 통해 밝혀집니다.

“아버지 김신일 변호사가 철거민들의 인권 문제에 관여를 했을 때 철거민 하나가 불만을 품고 집에 들이닥쳐서 왜 해결하지도 못할 일에 끼어들어 잘난 척을 하냐며 살 곳을 내놓으라고 난동을 피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능이 정상과 저능의 경계선상에 있었던 노동자였는데 분노 조절이 안 되는 모자라는 사람이었다는 게 중론이었습니다. 그 일로 김석주 어머니가 다치게 됐죠. 그땐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하기 전이었고 낚시를 하러 가서 집을 비웠다던가.

그 후로 둘 사이가 멀어지게 됐죠. 나중에 3당 합당을 하면서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는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가 주장하는 가치의 순수함조차 시니컬하게 바라보면서 부자 사이가 극을 달렸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엄청나게 영향을 미쳤던 기억들을 잃은 후 김석주(김명민)는 본래의 순수함과 정의감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지요. 김석주는 이제는 자신의 가치관과는 전혀 맞지 않게 된 대형 로펌(차영우펌)을 사직합니다.

화면은 박스 하나를 들고 나오는 김석주의 모습을 길게 보여줍니다. 건물을 나오면서, 깊게 내뱉는 안도의 한숨은 마치 깊은 터널을 빠져나와 새로운 빛을 만난 것과 같은 홀가분함을 보여주지요.

그 후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법정에 섭니다. 이제 피해자의 입장에서, 과거에 자신이 대변했던 권력과 맞서 싸우게 됩니다. 한마디로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치열하게 싸우면서, 다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거지요.

“옳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못하고 산다면 뭘 위해 공부하고 뭘 위해 실력을 쌓는 거지?”
_ 개과천선 7회, 친구 박상태(오정세 분)에게
“지금 당장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편이 더 이롭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 그렇게 해서는 안됐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올 거예요. 저도 겪어봤으니까요. 작은 지옥을 피하려고 더 큰 지옥을 만들어봤으니까요.”
_ 개과천선 7회. 억울한 피해자를 위해 증인으로 나올 것을 설득하며.
“맛있어? 그래, 행복이 별거냐. 우리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말자. 응?”
_ 개과천선 11회, 오랫동안 길러온 개에게 먹을 것을 주며.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야.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그 사람 때문에 갈 길 안 갈 거야?”
_ 개과천선 16회, 목숨까지 걸고 변론해준 사람이 변심한 것에 분개하는 인턴 이지윤(박민영 분)에게

김석주(김명민)는 기억은 결국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반목했던 아버지와 눈물의 화해를 하지요. 그토록 미워하고 원망했던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고, 사랑하고 미안해했는지 그 진심을 알게 된 겁니다.

마지막 회, 아버지와 김석주의 대화가 가슴 찡하게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나의 독선 때문에 니가 먼 길을 돌아왔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김석주: 아버지가 아니라 제가 만든 마음의 적과 싸웠던 거예요.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나를 만듭니다. 기억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다면, 나의 삶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때의 ‘나’는 어떠한 모습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