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하철 안에서 ‘꽃보다할배’ 1화를 무심코 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들이 배낭여행 가시는 것이 뭐 대수일까 싶어서 별 기대 안 하고 보고 있었죠. 그런데 1화가 너무 빨리 끝나버린 겁니다. 왜 이렇게 러닝타임이 짧지? 하고 고갤 들어보니 제가 내려야 할 역을 한참 지났더라고요. 1화가 끝날 때까지 눈을 못 뗄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할배들과 이서진 씨의 알 수 없는 매력에 묘하게 빠져들었죠.
꽃보다 시리즈를 보고 있자면 재미도 재미지만,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집니다. 바쁜 일상 속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랄까요? 여행이라는 소재 자체가 사람들의 ‘일상 탈출’이라는 로망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뭔가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나영석 피디의 훌륭한 연출력도 한몫 했을 테지만, 이 재미의 본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우러나오는 ‘편안함’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보면서 참 부러웠습니다. 그들의 우정이. 어떻게 저렇게 50년 동안이나 만날 수 있었을까? 싶었죠. 상상조차 하기 힘든 ’50년 우정’의 케미를 할배들이 보여주었고, 윤상, 이적, 유희열 청춘도 ’20년’이라는 긴 우정의 자연스러움을 보여주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중간에 고비는 없었을까? 한결같은 마음으로 친구 사이를 유지하기가 쉬웠을까? 그렇게 계속해서 보다 보니 오래된 인간관계의 비결이 엿보이는 듯했습니다. ‘이래서 오래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겠구나’라고 엿보았던 비결을 살짝 공유해볼까 합니다.
비결 1. 상대에게 바라는 마음이 놓이다
할배들은 파리 골목을 그냥 걷기만 해도 지혜와 연륜이 느껴집니다. 나이 어린 사람들이 아무리 가지려고 노력해도 안 되는 연륜 말이죠. 그 연륜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여유 있는 모습이랄까요? 그런 여유 있는 모습은 할배들 사이의 우정에도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야 내가 죽어야 연락할 거냐, 전화라도 한번 해봐라.”
라며 동생들에게 버럭 하는 순재 할배의 호통. 그런데 어쩐지 가시가 없습니다. 진짜 서운해서 말한다기보다는 자기 죽음조차 웃음의 소재로 내놓을만큼 여유 있어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동생들에게 큰 기대하는 마음은 없어 보입니다. 진짜 연락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호통쳤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그런 ‘사소한’ 감정 따위는 가뿐하게 넘긴 경지인 듯 보입니다.
동생 할배들도 마찬가지 경지입니다. 잔소리를 듣고 나서도 눈치를 본다거나 일부러 미안한 척을 안 합니다. 그냥 무덤덤하게 웃습니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말이 전화라도 한 번 해보라는 말을 희석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무덤덤함 속에는 ‘그저 건강하기나 하소’라는 정이 묻어납니다. 그저 서로 건강한지 안부를 묻고 행복하게 오래 같이하기를 바랄 뿐, 그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어 보입니다. 서로 연락을 안 해서 미안하고 눈치를 보는 그런 불편한 마음조차 느껴지지 않죠.
그래서 편안한 걸까요? 서로에게 바람도 실망도 눈치도 없이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는 모습. 그런 할배들의 모습에서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이미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기에 크게 바라지도 크게 실망하지도 않으면서 서로를 깊게 이해하는 할배들의 모습 말입니다. 그 모습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마음이 보는 사람의 마음도 따뜻하게 합니다. 이것이 꽃할배 시리즈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의 본질이자, 또 모든 인간관계의 본질이 아닐까 싶네요.
우리는 살면서 상대방에게 많은 것을 바랍니다. 친구든, 연인이든, 가족이든 말이죠. 대개는 사소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소한 기대와 실망들이 쌓여 상대방에 대한 감정이 나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체념합니다. ‘에휴 내가 기대를 말아야지’ 라면서요. 하지만 체념은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발전시키지 않습니다. ‘기대와 바람을 버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건강한 인간관계의 포인트는 상대방에게 ‘고마워하는 것’일 것입니다. 할배들은 항상 고마워하십니다. 옆에 있어 주는 동생, 형에게 고마워하고 짐꾼 이서진 씨에게도 항상 고마워합니다. 수고했다, 말해줍니다. 이렇게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줄 아는 마음이 어쩌면 오래 유지되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결 2. 약간의 솔직함
할배들의 50년 우정에 버금가는 케미를 보여준 청춘도 있었습니다. 유희열, 이적, 윤상 조합의 우리나라 대표 40대 청춘입니다. 40대라는 젊은 나이였지만(할배들에 비교하면 어린이입니다 ㅎㅎ), 할배들에게서 느꼈던 똑같은 편안함을 이 청춘한테서 느꼈습니다. 왜였을까요? 죽음이 가까워진 나이도 아니고요. 방송을 보다 보면 청춘들은 서로 눈치도 많이 봅니다. 윤상은 형이지만 투덜대고요. 막내 동생 이적은 오히려 형을 케어하느라 바쁩니다.
서로한테 큰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딪히는 일들이 생깁니다. 숙소를 선정하는 일이나 식사를 선택하는 등 아주 사소한 일들에서 말이죠. 의견 차이로 냉랭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합니다. 이런 좋지 않은 상황에서 자칫하면 그냥 덮어두고 괜찮은 척하고 지낼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지 않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청춘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조금씩 솔직하게 서로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도 나눕니다. 관계에 불만이 생겼을 때 이들은 적당한 선을 긋고 친해지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조금 더 다가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 상대의 아픔을 이해하게 되었고요. 약간 더 진솔하게 나의 이야기, 나의 아픔도 공유하면서 청춘들은 더 깊은 사이가 됩니다.
그러다 보니 시리즈 내내 청춘에게서 받은 느낌은 ‘같은 집에 사는 형제’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식적이거나 의무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냥 편안하게 내 모습 다 보일 수 있는 그런 사이 말이죠. 약간의 솔직함이 있었기에 이렇게 허물없는 인간관계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우리도 사람을 알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불만이 쌓이고 솔직해지기 어려운 순간들이 옵니다. 내 자존심 때문이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적당한 거리를 두는 관계가 되어버리죠. 그런데 내가 먼저 아주 약간만, 10cm만큼만 솔직하게 다가가려는 노력만 있어도 그 거리는 확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순간은 내가 손해보는 것 처럼 느낄지라도 약간만 솔직해지면 상대방과의 사이가 더 돈독해질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값진 일은 없습니다.
비결 3. 약간의 노력
쉽게 인간관계가 끝나버리는 경우가 요즘은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안 만나면 그만이니까’ 하고 그냥 등 돌려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귀찮으면 연락 안 하고, 나한테 조금만 상처를 주면 피해버립니다. 그렇기에 꽃보다 시리즈에 나오는 20년 지시, 50년 지기의 우정이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요즘 흔치 않으니까 더 그렇습니다. 사람과 오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꽃보다 시리즈의 우정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이렇게 쉽게 끝나버리는 인간관계가 아닌, 거센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을 깊은 뿌리가 보여서일까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노력 없이는 단단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단한 노력 없이는 오래된 인간관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몇십 년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노력들이 많았을 겁니다. 화가 나고 실망을 했다가도 10초 멈춰서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노력. ‘나만 옳아’라고 고집부리는 대신 내 고집을 꺾어보려는 노력. 정말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말해보는 이런 노력들 말이죠.
진정한 인간관계란 이런 게 아닐까요. 나를 조금씩 내려놓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노력을 하는 관계요. 오래된 관계가 꼭 진정한 인간관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우정이 오래될 수록 이러한 노력이 나이테처럼 깊게 새겨져 튼튼한 뿌리를 세울 것입니다. 부단한 노력이 없다면 멀어지기 쉬운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이니까요.
비결 4. 함께하려는 마음
마지막으로, 할배들과 청춘들을 보고 있자면 ‘함께 하는’ 사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잘 지내야만 하므로 형식적으로 노력하고 애쓰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 예전에도 함께 했었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하는 사이.
그들은 항상 서로 옆에 있어 주어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함께 여행을 올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합니다. 여행을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그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함께 여행을 하고 함께 추억을 만든 것이 이들에게는 가장 값지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사람과 ‘함께’ 하고 싶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