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나는 대체적으로 안전한 길을 택하는 아이였다. 교우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되도록이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친구들의 의견을 들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학업 경쟁이 치열해졌고, 아이들은 각각 파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괜히 그들 무리에 끼었다가 엄마한테 안 좋은 잔소리를 들을까 봐,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공부만 파고들었다.
내가 왕따라니! 충격으로 모든 사람 원망했던 중학 시절
반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가 돼 버렸고, 공부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곧잘 와서 묻곤 했지만 친구로서 다가오진 않았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의 문이 서서히 닫히면서 간혹 친구들이 질문해도 잘 답변해 주지 않았다. 그런 게 화근이었는지 친구들은 불만을 갖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지금 왕따를 당하고 있는 건가 했는데, 정말로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애들이 없었다! 두 명의 친구는 아예 대놓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던 엄마도, 나를 못살게 구는 친구들도….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왕따 상황은 일단락이 되었다.
그것은 그때뿐이었다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경험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누군가 나를 또 왕따시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무서웠고, 우연히 그 친구들을 마주치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니까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그러니 그 아이들이 더 불쌍한 거라고, 그냥 훌훌 털고 살자며 나를 다독였고, 그게 용서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말 왕따였을까, 마음 버리며 객관적으로 그 상황 돌아봐
그러다 10년 만에 나를 괴롭히던 친구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이미 마음에서 용서했기에 그 친구를 만나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말 생각에 불과했다. 그 친구를 보는 순간 원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와 정반대였다.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진심으로 반갑다고 했다. 솔직히 그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용서하기는커녕, 미움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건 나였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아이는 내게 원수였다.
친구는 계속 연락하며 지내자고 말했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친구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을까? 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 미스터리한 상황이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그즈음 마음수련을 하게 된 나는 내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있는 그 사건을 떠올리며 버려보았다. 처음에는 그때의 일만 떠올려도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버리면서 나는 점점, ‘나’로부터 벗어나 중학교 시절의 ‘나와 친구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왕따로 만들었던 것, 친구들에게 미안해
생각해 보니 그 친구는 두루두루 교우 관계가 좋은 아이였다. 그 친구는 혼자 외롭게 있는 내가 안타까워 그 또래의 방식으로 나를 주목받게 해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 친구에게는 그러한 놀림이 친구들 사이의 흔한 장난 같은 것이었는데, 나만 내 열등감에 사로잡혀 나를 왕따시킨 거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철석같이 그 친구가 잘못했고, 나는 불쌍한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수련할수록 그게 아니었다. 나는 착하고 바르다며 살아왔지만, 그게 얼마나 오만했던 건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 행동으로 하지 않았을 뿐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마음속으로 ‘왕따’시키고, 미워하며 살아왔던가. 그렇지만 언제나 세상은 똑같이 햇살을 비춰주고, 숨 쉬게 해주며 모든 것을 품어안고 늘 용서해주고 있지 않았나. 용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내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한 순간 세상이 평화롭게 보이기 시작했다.